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캐서린 헵번 (문단 편집) === 스펜서 트레이시 === 아직 휴즈와 사귀고 있던 1941년, <우먼 오브 더 이어>를 찍으면서 두 아이가 있는 [[유부남]]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를 만나자마자 휴즈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트레이시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후 헵번은 25년이 넘는 세월 동안 9편의 영화를 같이 찍었다. 트레이시는 첫 만남부터 헵번에게 무례하게 굴었지만 트레이시에게 크게 반한 헵번은 개의치 않았다. 트레이시는 사귀게 된 이후로도 수십 년간 매일같이 헵번을 다른 동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모욕했지만 헵번은 단 한 번도 반박하지 않고 트레이시의 지적과 명령에 순응했다. 헵번은 트레이시 근처에 자세를 낮추고 앉아 그의 모든 행동과 말에 주의를 기울이곤 했다. 동료 배우들은 헵번이 수시로 트레이시의 몸단장을 챙기고 마사지를 해주는 걸 자주 목격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racey_bronze.jpg|width=100%]]}}} || || 헵번이 청동으로 주조한 트레이시의 두상 || 헵번은 포드 때와 마찬가지로 트레이시와 매우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트레이시는 신체 기관 전반이 상태가 좋지 않았던 [[청각장애인]] 아들을 평생 간병한 아내[* Louise Tracy. 1896 - 1983.]를 존경해 이혼을 강경히 거부했다. 트레이시가 헵번을 자신의 공간에 재우는 걸 싫어해서 헵번은 트레이시와의 동거조차 좌절 당하고 각자의 거주공간을 유지해야했다. 트레이시는 [[베벌리힐스]] 호텔에서, 헵번은 배우 존 길버트[* 무성영화 시절에 [[루돌프 발렌티노]]와 호각으로 여겨졌다. [[그레타 가르보]]의 연인이었다.]의 옛 자택에서 지냈다. 자기파괴적 성향의 트레이시는 방문을 잠그고 알몸이 되어 눈에 뵈는 게 없을 때까지 혼자 술을 들이키곤 했다. 그래도 헵번은 혹시 트레이시가 자신을 필요로 할 일이 생길지 모른단 생각에 트레이시의 호텔 방 앞 복도에서 잠들 때가 많았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직원에게 부탁해 문을 따고 방에 들어가 자신의 분비물로 더럽혀진 채 잠들어있는 트레이시의 몸을 닦아주었다. 게다가 트레이시는 [[불면증]]으로 하루에 두세 시간 밖에 잠들지 못했고, 낮엔 [[커피]]와 [[각성제]]로 버티고 있었다. 갈수록 짜증이 늘어 헵번에게 더 심하게 대하기 시작했지만, 헵번은 불평없이 버텼다. 헵번은 트레이시의 사후에 트레이시가 술에 취해 자신을 때린 적이 있음을 시인하기도 했다. 1950년부터 트레이시는 헵번의 권유로 감독 조지 큐코어의 오두막 한 채를 빌려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헵번은 집주인인 조지 큐코어에게 자기 대신 트레이시의 상태를 체크해달라고 부탁했다. 트레이시는 이 오두막에도 헵번이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트레이시를 만난 뒤 트레이시에게만 충실해진 헵번과 달리[* 헵번도 많은 여성들과 바람피웠다는 주장이나 정황들은 있으나 아직 확실한 증거들은 나오지 않았다. 여담 항목 참조.], 트레이시는 1952년 <사선을 넘어서(Plymouth Adventure)>를 찍으며 [[진 티어니]]와 이중 바람을 피웠다. 자잘한 바람까지 따지자면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1956년 [[알콜 중독]]과 [[약]]에 대한 의존으로 완전히 망가진 트레이시는 [[MGM]]에서 계약을 취소 당한다. 헵번은 옛 연인 [[존 포드]]에게 그의 차기작 <마지막 함성(The Last Hurrah)>에 트레이시를 캐스팅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1958년 트레이시와 포드는 28년 만에 협업하게 된다. 한편, '''일부에 잘못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트레이시의 아내 루이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용인해준 적이 없다'''. 루이스는 죽을 때까지 트레이시의 아내로 남기를 원했고, 언제라도 헵번과 트레이시가 관계를 끝내고 트레이시가 집에 돌아오길 바랬다. 트레이시와 헵번이 그 소원을 평생 들어주지 않았을 뿐이다. 헵번은 트레이시와의 관계 내내 아내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고, 트레이시의 공간에 자신의 자취를 남기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그러나 트레이시와 헵번의 불륜이 대중에 새어나가지 않게 가장 고생한 사람은 [[MGM]]의 언론 담당인 하워드 스트리클링[* Howard Strickling.]이었다. 트레이시가 병환으로 앓던 말년 5년 간 헵번은 그를 간호하기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중단했다. 트레이시는 호흡기, [[간]], [[방광]], [[신장]]이 다 망가졌고, [[전립선 비대증]]과 [[고혈압]]에 시달렸다. 기억도 온전치 않았다. 헵번은 트레이시의 촬영장에 24시간 붙어있었다. 헵번의 존재가 거슬려서 촬영에 방해가 된다는 트레이시의 불평에 헵번은 최대한 트레이시의 눈에 안 띄게 숨어서 [[뜨개질]]을 하며 대기하다가 쉬는 시간마다 [[위궤양]]에 도움이 되는 [[우유]]와 약을 먹였다. 1963년 트레이시는 [[산소호흡기]]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결국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한 걸음에 달려온 아내 루이스는 트레이시가 집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트레이시는 다시 조지 큐코어의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이번엔 헵번도 이 오두막에 들어갔다. 다만 트레이시와 같은 방에서 지내진 못하고 식모방에서 자야했다. 트레이시는 결국 1965년 [[전립선]]을 절제했고 그 과정에서 거의 죽을 뻔 했다. 헵번은 1967년 트레이시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찍을 땐 트레이시가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트레이시의 출연료는 트레이시가 촬영을 다 완성하면 받겠다'는 조건을 단 조건부 날인 증서를 둬야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bp_.blogspot.comtumblr_mj2ggfNDYS1qcwbteo-575055a26feeabaafa141ec207805d2cb4f4e330.jpg|width=100%]]}}} || || <초대받지 않은 손님> 촬영장 || 트레이시는 1967년 사망했다. 헵번은 아내 루이스가 오기 전에 급히 오두막에 있던 자신의 짐을 다 빼내야했다. 트레이시는 감독 조지 큐코어가 증인으로서 지켜보는 가운데 유언장을 통해 전재산을 아내 루이스에게 남겼다. 헵번은 트레이시의 장례식만큼은 자신이 지휘하고 싶어했지만, 아내 루이스가 거부해 하지 못했다. 헵번은 트레이시의 가족끼리 치르기로 한 장례식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헵번은 루이스에게 이제 친구가 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불륜 피해자였던 루이스는 당연하게도 "당신은 그저 소문에 불과한 사람"이라고 대꾸했다. 이 발언을 모욕으로 받아들인 헵번은 나중에 트레이시와의 관계가 거의 공식화된 후 이 사건을 들먹이며 실제로 트레이시의 곁에 있던 건 자신인데 어떻게 겨우 소문 따위로 취급할 수 있냐며 루이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헵번은 부모님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였던 트레이시의 딸 수지 트레이시[* Louise "Susie" Treadwell Tracy. 1932 - 2022.]와는 친구가 되는 데 성공했다. 함께 다정한 모습으로 [[PBS]] TV 다큐멘터리 (1986)에 등장하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epburn_susie.jpg|width=100%]]}}} || || 스펜서 트레이시의 딸 수지 트레이시와 헵번, 1986 || 헵번이 사망하기 전 한 작가는 "왜 그렇게 당신을 함부로 대하고 폭력적이고 바람피워댄 남자를 떠나지 않았냐?"고 대놓고 물어봤는데, 헵번은 "그를 사랑했는데 뭘 달리 어쨌겠나? 난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고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